
이퀄리즘이 소환된 건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 페미니즘에 반대하면서도 스스로가 성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선 페미니즘을 성차별주의로 몰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페미니즘 아닌 다른 언어가 필요하다. 그것이 이퀄리즘이다.
연속성보다 중요한 건 단절이다. 불의의 연속을 끊어내는 것, 과거에 당연시했던 차별과 야만을 이제는 ‘금지’하겠다는 것. 페미니스트 선언이란 그런 것 아닐까. 지금 이 순간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것.
그러한 백래시가 온전한 무無의 상태에서 페미니즘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미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던 여성혐오의 정서 위에서 가시화됐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시화는 세상이 더 퇴행된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비가시적으로 마치 공기처럼 존재하던 혐오와 차별의 정서가 가시화될 때 차라리 우리가 지적하고 싸워야 할 불의의 총체는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며느라기>에서 구영과 그의 가족들은 효와 자식에 대한 사랑과 공동체 의식처럼 각각의 미덕을 재료로 가부장제라는 구조를 강화하며 서로가 서로를 구속한다. 하지만 멀리서 보면 모두가 가부장제의 피해자라는 결론은 안일하다. 모두가 공범이 되는 이 구조적 폭력 안에서 당연히 폭력의 피해자는 존재한다. 그것이 민사린이며, 만화 바깥에 있는 수많은 며느리다.
작품 속 며느라기는 "시댁 식구에게 예쁨받고 싶은" 시기로서의 며느라'기'이다. 구조는 언제나 규범의 내면화를 통해 존속된다. 규범의 내면화를 통해 착취가 어떻게 정당화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구조적 악순환을 끊어낼 의무는 사린에게 있지 않다. 이 구조를 반성하고 해체할 도덕적 의무와 책임은 결국 가부장제와 그 착취 구조의 최대 수혜자인 남성들에게 있다.
<개그콘서트> '남성인권보장위원회'에서 황현희, 박성호, 최효종이 "니 생일엔 명품 가방, 내 생일엔 십자수냐!”를 외치며 남성이 겪는 역차별을 주장하던 모습은 여성들에게 경제적으로 선행하는 차별을 지우고 스테레오타입으로서의 된장녀 프레임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여성혐오 개그가 맞다. 당시 이 코너를 보며 웃을 수 있었던 건 아직 그 안의 차별적 맥락을 읽어내지 못했던 탓이 크지만, 이 개그가 현실의 여성차별과 분리된 하나의 가상적 세계이며 직접적 차별을 재생산하진 못할 거라는 안일한 낙관주의 때문이기도 했다.
흑인 분장 개그에 대해 샘 해밍턴이 이는 인종을 놀리는 것이라고 지적하자 황현희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반박하며 "그렇다면 과거의 영구, 맹구는 자폐아 비하였냐..."고 덧붙인다. 역설적으로 그는 놀라울 정도로 과거 개그의 차별적 요소를 짚어냈다. 이는 자신의 순수한 의도를 과신하는 남성이 결과적으로 자신이 가해자가 될 가능성을 놀라울 정도로 과소평가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차별의 폭력성을 인지하면서도 자신이 그에 동참하게 될 위험성을 간과하는 황현희의 순진한 믿음은 스스로의 선량함을 굳게 믿는 남성들의 (생득된 그들의 특권과 가해자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자기모순을 꽤 투명하게 드러내준다.
정치적 선언을 한다는 것은 앞으로의 실천에 대한 스스로의 다짐으로서만 의미를 가질 뿐, 그 자체로 어떤 자격이나 정체성을 부여해주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실천이다. 남성 페미니스트란 자신이 속한 남성 중심적 사회에 스민 여성혐오적 관점과 편견을 끊임없이 점검하고 반성하며, 자신에 대한 여성들의 의구심 가득한 시선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언제든 의도와 상관없이 성 불평등 구조 안에서 자신이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잊지 않는 그 모든 실천으로서만 존재한다. 스스로에 대한 한 치 의심 없는 유아인의 태도(애호박부터~)는 그래서 조금 당혹스럽다. 단순히 모순적이라서가 아니라, 너무 익숙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 나 또한 반성하게 되는 부분이다. 메갈리아의 과격한 실천을 태어나서 처음 목격하곤 친한 남자친구에게 "그건건 나의 페미니즘이 아니다. 나는 온건한 페미니즘을 지향한다"고 말했다. 그때는 누가 이상형을 꼽아보라고 물으면 상대방 눈치가 보여 외적 부분을 언급하지 못할 정도로 주변의 낙인에 민감했던 시기였다. 이퀄리즘이니 온건한 페미니즘이라는 것은 없다. 억눌려 왔던 여성들의 투쟁적 힘을 빼앗지 말자. 여성혐오 발언들이 듣기 좋은 말들로 해결될 일이었다면, 굳어진 것을 금세 녹여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낼 수 있는 정도의 경도를 가진 사회였다면, 미러링 없이 이미 해결되어야 했을 일이었다.
가상 세계에 숨지 말고 진짜 본인들이 입은 피해를 입증해보라는 말은 어떠한가. 자신의 페미니스트라는 지위는 본인의 선언만으로 정당화되지만, 정작 여성 차별 사회에 사는 여성들은 피해자성을 입증해야 한다.
1487년 발간된 당대의 베스트셀러 <마녀의 철퇴>는 마녀 악행의 핵심이 악마와의 성교라 하는 점을 비롯해 다방면적으로 여성혐오적이다. 이 책에는 전통적 정조관을 통한 여성 억압의 메커니즘이 그대로 발현됐다.
* 초경에 대해 '이제 여성'이 된 것이라고 축하하는 문화는 여성을 아이 낳는 존재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여성혐오적이다.
한국 남성들이 아이린과 손나은이 잘못했다고 믿는 건 그들이 경험하고 공유해온 어떤 질서를 아이린과 손나은이 위반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걸그룹이 성적으로 객체화되고 상품화된 존재, 객체여야한다는 경험적 질서다. 꽤 오랜 시간 실제로 그러했기에 한국 남성 부족은 이것을 서로 합의된 규칙으로 받아들였다.
정치철학자인 벤자민 바버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유가 "한 종류의 음식에 곁들여 나오는 양념 소스를 선택하는 자유와 닮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비꼰 바 있다. 저 수많은 상업 광고가 특정 성에게 부여한 특정한 역할만을 강요하면서 마치 다양한 삶의 방식을 선택해서 소비할 수 있는 것처럼 군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아마도 대중문화 텍스트 비평이란 이처럼 아무 문제없는 듯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한 텍스트들 사이의 결을 헤쳐 불균형과 불의를 드러내는 방식으로서나 어느 정도 실용적 가치가 증명될 것이다. 그래서 의문이다. 세상을 불편하게 인식하지 않는 비평이란 존재하는가? 혹은 존재할 이유가 있는가?
“사회적으로 상식처럼 통용되는 어떤 표현이나 담론, 관습에 대해 누군가 불편함을 느낄 때 그 불편함에 대해 성의 있게 논의하지 않으면 그것이 틀렸는지 맞았는지 따져볼 기회조차 없다”고. 단순히 내가 이것을 불편하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안건을 올리는 것만으로 실질적인 공론화가 되는 건 아니다. 그 다음, 누군가가, 내가 불편하다고 느낀 기존 상식의 입장에 선 누군가가 ‘나는 너의 불편함이, 예민함이 불편하다’고 나설 때, 비로소 나의 불편함은 불완전하나마 상호 소통의 맥락 위에서 다뤄진다.
@ 디스패치 '팩트주의'의 저널리즘적 맹점
디스패치의 모토는 '뉴스는 팩트다'이다. 어뷰징이 90% 이상을 차지하는 연예 매체들 사이 나름 단독 취재를 통해 희귀한 팩트를 발굴해내는 역량이 있다. 그러나 그 역량이 언론으로서의 역량인 공익의 증진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뉴스는 팩트다'라는 그들의 모토는 '뉴스는 팩트여야 한다'는 뜻이어야지 '뉴스는 팩트면 된다'는 뜻이어서는 안 된다.
'공익적'인 일을 판별해내기 위해서는 무엇이 공익인지에 대한 합의된 기준과 이 사안이 그 기준에 적합한지 판단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진지한 성찰 대신 쉽고 빠르게 언론의 보도들에 공익적 가치를 부여해주는, 착시효과를 일으키는 마법의 개념 두 가지가 있다. 바로 언론의 자유와 독자의 알 권리이다. 디스패치는 이 두 가지 개념의 착시효과에 의존한다.
언론의 자유, 보도의 자유라고 하는 것이 자유의 가치로 완전히 긍정된다면, 언론이 누군가의 사적 영역을 침범해 대중에게 알리는 것 역시 긍정될 것이다. 이것은 언론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불특정 다수의 자유가 침해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적 관점으로도 모순이다.
2018년 초 서지현 검사의 검찰 내 성추행 폭로가 한국 미투 운동의 강력한 분기점이 된 것은 단순히 그가 검사로서의 권위를 가져서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법적 정의와 제도 안에서의 해결이 현재로선 허구적이란 것을 실증했기 때문이다.
채사장과 강신주는 자신들의 에세이에서 상식과 규범을 주관과 대비되는 외적인 객체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이 이분법은 다분히 허구적이다. 상식이라는 것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나와 공동체 간에 상호 주관적인 합의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줄리언 바지니는 저서 <가짜 논리>의 '팽팽한 균형은 왜곡을 부른다' 챕터에서 "나는 토론의 '균형'이라는 게 결국 모두에게 의견을 개진할 똑같은 기회를 부여하고, 각 진영에서 제일 선명한 입장을 소개하는 수준일 때가 빈번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고 비판적으로 술회한다. 바지니의 통찰처럼 양극단의 주장을 소개하는 게 균형이라는 착각은, 어떤 한쪽이 극단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들을 가치가 있는 것 같은 착시를 만들어낸다.
콩트 수준의 정치 패러디는 그 자체로도 문제지만, 결과적으로 정치 혐오에 복무한다는 점에서 더 문제적이다. 대통령과 내각의 무능함을 보여주는 것이 정치 혐오는 아니다. 중요한 건 무능함의 본질을 짚어내느냐, 무능함을 놀리는 데 그치느냐이다.
옳고 그름에 대한 평가는 상대방과의 상호 주관적인 소통의 영역에서 결정되는 것이지 자기만족적인 좋은 의도로부터 도출되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고려해보는 역지사지 능력이야말로 인간의 고도화된 지성과 도덕성의 근간이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가 불편한 이유
이것은 착각이자 기만이다. 대체 한국 중년 남성들이 언제 그렇게 신사적이고 언제 그렇게 이타적이었다는 말인가. 이 기만을 유지하기 위해 드라마는 오직 동훈의 관점만으로 세상을 정렬한다. 권력을 지닌 것 같지만 실은 언제나 흔들리고 고통 받는 나, 그런 내가 견뎌내야 하는 세상, 그리고 그런 내가 이해해줘야 하는 젊은 여성. 중년 남성 내면의 시선으로만 그려진 자신들의 삶이란 이렇듯 애틋하다. ----> 자기 연민 범벅인 것이다!
방송을 제작하고 송신하는 권한이 있는 자리에 선 우리는 차별적 의미가 담긴 이미지를 주의해야 한다. 흔히 지상파는 변화에 가장 느린 집단이라고도 하지만, 표현의 윤리적 기준에 있어선 가장 선두에 서야 하는 집단이다.
이제 시청자들은 혐오 표현으로 웃겨서는 안 된다는 당위를 공유할 뿐 아니라, 그런 개그에는 웃지 못하게 되었다. 반대로 혐오 표현이나 막말을 즐기는 이들이라면 어차피 TV 대신 유튜브에서 철구, 보겸 등의 BJ 영상을 찾아볼 것이다. 이제 지상파 웃음의 경쟁력은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걸리는 게 없는 마음 편한 웃음에 있다. 과거 우리가 어떤 차별적 뉘앙스를 문제의식 없이 웃고 소비했을지라도,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게 아니다. 사실 그때도 틀렸다.
…하지만 그것이 한 지상파 예능이 누군가의 망신을 생중계하고 모두가 손가락질 할 기회를 주는 대국민 사죄 쇼로 진행되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골목식당>은 이런 징벌적인 서사 및 쾌감에 대한 당위적 근거를 마련하는 대신, 백종원이라는 존재의 권위로 알리바이를 대체한다. <골목식당>의 시청자들은 자신들과 훨씬 가까울 일반인 자영업자의 입장에서 혼나는 기분을 느끼기보다는 백종원의 입장에 서서 징벌 서사의 쾌감을 정당화한다.
제작자의 의도와 텍스트의 의도, 그리고 텍스트의 의도가 실제로 소비되는 맥락은 제 각각 다르다.
침묵하는 희생자에 대한 선의와, 침묵하지 않는 약자들에 대한 거부감. 이것은 어딘가 이상하지만 놀랍진 않다. SNS에서 노란 리본 프로필 사진을 달고서 페미니즘 운동이나 노동 운동을 비난하는 계정을 보기란 어렵지 않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과 함께 침몰했던 이들을 위해 눈물 흘리면서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발화하는 이들으 ㄹ향해서는 '극렬 페미니스트'나 '강성 노조'와 같은 말로 배제하고 침묵시키려는 것은 이 사회가 세월호에 대해 제대로 된 애도를 해내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허수아비 때리기가 문제인 건, 단순히 허상을 때려서가 아니라 그 허상으로 실재하는 진짜 문제를 가려버려서다.
- 교조적 : 역사적 환경이나 구체적 현실과 관계없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진리인 듯 믿고 따르는 것.
- 우군 : 자기와 같은 편인 군대
- 시혜적 : 은혜를 베푸는
- 감읍하다 : 감격하여 목메어 울다
- 화용론 : 하는 이, 듣는 이, 시간, 장소 따위로 구성되는 맥락과 관련하여 문장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분석하려는 의미론의 한 분야.
- 횡 : 가로 / 종 : 세로
<<횡으로는 ~, 종으로는 ~>> 이런 식으로 사용 가능함.
EX) 이 공간은 횡으로는 좁은 편이나 종으로는 상당히 길다. 종으로는 달마다 피를 흘려야 했던 여성들의 역사를 연대기年代記로 풀어내는 동시에, 횡으로는 자신의 몸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해하고 공유하며 사회적 의제로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여성들의 피의 연대連帶를 보여준다.
- 약동하다 : 생기있고 활발하게 움직이다
- 어폐 : 적절하지 아니하게 사용하여 일어나는 말의 폐단이나 결점, 남의 오해를 받기 쉬운 말
- 수세적 : 현재의 상태를 지키고자 하는
- 차치하다 : 내버려 두고 문제 삼지 아니하다
- 상찬하다 : 기리어 칭찬하다
- 유보하다 : 어떤 일을 당장 처리하지 않고 나중으로 미루어 두다
- 척지다 : 서로 원한을 품어 반목하게 되다
- 설복 : 알아듣도록 말하여 수긍하게 함
- 압제자 : 권력이나 폭력으로 남을 꼼짝 못 하게 강제로 누르는 사람
- 이전투구 :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비열하게 다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국지적 : 일정한 지역에 한정된
- 특기하다 : 특별히 다루어 기록하다
- 핍진하다 : 실물과 아주 비슷하다, 사정이나 표현이 진실하여 거짓이 없다
- 오컴의 면도날 법칙 :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그에 대한 불필요한 가정이 가장 적은 설명이 진실일 확률이 높다
- 비화되다 : 직접 관계가 없는 데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다
- 현현 : 명백하게 나타나거나 나타냄
- 암군 :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임금 EX) 민주주의는 성군을 뽑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암군이 집권해도 크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 기고문 : 신문이나 잡지 등에 싣기 위하여 보낸 글
- 의뭉스럽다 : 보기에 겉으로는 어리석어 보이나 속으로는 엉큼한 데가 있다
- 입진보 : 말로만 진보를 말하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 <-> 발진보
- 표방하다 : 어떤 명목을 붙여 주의나 주장 또는 처지를 앞에 내세우다.
- 제언 : 의견이나 생각을 내놓음. 또는 그 의견이나 생각.
- 중차대하다 : 중요하고 크다
- 사달 : 사고나 탈
- 배태하다 : 어떤 현상이나 사물이 발생하거나 일어날 원인을 속으로 가지다
- 정파적 : 정치상의 파벌과 관련된 것.
- 요설 : 쓸데없이 말을 많이 함, 요사스러운 수작, 쓸데없이 말을 많이 하다
- 예지자 : 사물의 도리를 꿰뚫어 보는 뛰어난 지혜를 가진 사람
- 사변적 : 경험에 의하지 않고 순수한 이성에 의하여 인식하고 설명하는
- 당의정 : 불쾌한 맛이나 냄새를 피하고 약물의 변질을 막기 위하여 표면에 당분을 입힌 정제
- 술회 : 마음속에 품고 있는 여러 가지 생각을 말함. 또는 그런 말.
- 흠결 : 일정한 수효에서 부족함이 생김. 또는 그런 부족.
- 격세지감 : 오래지 않은 동안에 몰라보게 변하여 아주 다른 세상이 된 것 같은 느낌
- 성맹 Gender Blind
- 위악 : 짐짓 악한 체함
- 감화 : 좋은 영향을 받아 생각이나 감정이 바람직하게 변화함. 또는 그렇게 변하게 함.
- 월권 : 자기 권한 밖의 일에 관여함.
- 맥거핀 : 영화 등의 줄거리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을 마치 중요한 것처럼 위장해서 관객의 주의를 끄는 일종의 트릭이다.
- 일임 : 모두 다 맡김.
- 눙치다 : 마음 따위를 풀어 누그러지게 하다, 어떤 행동이나 말 따위를 문제 삼지 않고 넘기다.
- 부역하다 : 사사로이 서로의 일을 도와주다, 국가에 반역이 되는 일에 동조하거나 가담하다.
- 획책 : 어떤 일을 꾸미거나 꾀함. 또는 그런 꾀.
- 입지전적 : 어려운 환경을 이기고 노력하여 목적을 달성한 사람의 전기적 성격을 띄는
- 경천동지 :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뒤흔든다는 뜻으로, 세상을 몹시 놀라게 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