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미술에서는 르누아르의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따뜻함과 편안함을 기대하기 어렵다. 르누아르와 아방가르드 미술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뒤샹(프랑스, 다다이즘-초현실주의 영향, 1887-1968)을 비교해보자. 뒤샹의 <샘>은 서명을 제외하면 작품의 전부나 다름없는 변기는 뒤샹이 만들어낸 물건이 아니다. 그 변기를 만든 사람은 뒤샹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다.
르누아르의 시선에서 보자면 예술로 취급할 수 없었던 뒤샹의 작품이 현대 미술에서는 주된 경향으로 당당히 자리 잡았다. 이를 뒤샹이 〈샘〉이라는 작품을 1917년 뉴욕 독립미술가협회가 주최한 전시회에 출품했을 때 예술로 인정 받지 못했던 과거와 비교해보면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이 책은 이처럼 예술의 역사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20세기 초반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행했던 도전의 의미를 살펴본다.
예술이라는 단어의 뉘앙스는 시대에 따라 너무나도 달랐다. 대부분 미술사 책에서는 가장 오래된 미술 작품으로 동굴 벽화를 꼽는다. 왜 옛날 사람들은 그림을 어두운 동굴에 그렸으며, 이는 예술이 맞을까? 옛날 사람들은 실재와 실재를 그린 그림을 동일한 것으로 여기며 주술적 목적으로 그림을 그리면 그림 속으로 소의 영혼이 들어온다고 여겼다. 예술가 = 주술사, 예술은 종교 활동을 보조하는 수단의 의미가 강했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에서 도리안이 자신의 그림을 찌르자 도리안의 숨이 끊어졌던 모습과 유사
박물관에 전시된 현대 이전의 예술품들에서는 종교적인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 종교적 기능과 완전하게 결합되어 있는 예술의 형태를 우리는 제례적 예술이라 부를 수 있다. 예술이 종교적 목표를 충족시켜야 하기에 예술은 수공업적 방식이나 집단 창작에 의해 이루어졌다. (개인적인 예술가 개념X)
서양 음악의 아버지가 불리는 바흐와 베토벤은 독립된 예술가의 지위를 누리지 못했고 그저 궁정 소속 궁정 음악가에 불과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 천재 예술가 미켈란젤로 역시 교회나 궁정으로부터의 후원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당시 예술가는 후원자가 있어야만 했고 어떤 예술을 행할지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다.
Art는 원래 그리스어로 솜씨를 의미하는 평범한 단어였다. 근대로 접어들면서 솜씨라는 뜻의 ‘art’와 예술을 구별하려는 개념적 분류가 다양하게 시도되었다. 근대적 예술가는 후원의 굴레에 놓여 있던 이전의 장인/예술가와는 전적으로 달랐다. 18세기를 지나면서부터는 예술가(창조성, 영감, 혁신, 자유)와 장인(규칙, 능숙함, 모방, 종속)의 인식이 완전히 구별되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예술과 기술을 구별해야 하는 예술비평가라는 새로운 직업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예술의 지위가 변함에 따라 미술품은 교회나 궁전의 부속 장식물의 지위에서 벗어나 독립된 전시 대상이자 감상 대상으로 바뀌었다. 근대의 박물관과 미술관은 봉건 귀족의 권력을 물려받은 부르주아가 자신들의 권력을 자랑하는 곳이기도 했다.
예술에 대한 사회적 존경이 통용되려면 특별하다고 간주되는 예술을 ‘모시는’ 독립된 공간이 필요했다. 근대의 박물관과 미술관은 봉건 귀족의 권력을 물려받은 부르주아가 자신들의 권력을 자랑하는 곳이기도 했다.
작품이 미술관에 전시되려면 여러 조건들을 만족시켜야 했다. 첫째, 평론에 의해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아야 했다. 둘째, 반드시 유일무이한 원본이어야 했다.
그림은 사용 가치가 거의 없었기에 비평을 통해 인정을 받는가의 여부에 따라 예술가는 막대한 부와 사회적 인정을 누릴 수도 있고 굶어 죽을 수도 있다. 우리는 예술가 하면 보헤미안의 이미지를 떠올리는데, 이는 사실 근대의 자율적 예술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예술가의 모습이다. '인정'을 받는가에 따라 예술가의 모습은 벼락부자와 보헤미안의 모습으로 나뉘게 된다.
인정을 받느냐의 여부는 예술가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대단했기에 예술을 판정하는 기준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어져 왔다.
예술가는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반드시 인정을 받고자 했다. 인정을 받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인정 여부를 판단하는 예술 비평이 권장하는 기준을 철저히 따르는 것이다. 두 번째는 ‘새로움’으로 무장해 관습을 파괴함으로써 인정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이 방법에는 전통에 대한 도발과 이에 따른 스캔들이 수반되었다. 이 두 번째 전략을 선택한 것이 바로 20세기 초반에 나타난 아방가르드였다.
+ 미학은 예술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은 첫 번째 학문이다. 미학적 관점에서 예술 작품을 평가할 때 제일 중요한 요소는 작품의 질, 형식적인 요소이다. 하지만 사회학자들은 예술 현상을 독립적으로 간주하지 않고 예술 현상에는 사회적 인정 현상이 개입되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19세기에는 부르주아 지배가 횡행했고, 20세기에는 부르주아에 지배에 도전하는 세력이 나타났다. 예술은 19세기에 접어들어 자율성을 획득했지만 이내 위기를 맞이한다. 사진술이 등장하면서 회화의 전통적인 기능인 '재현' 에 대한 의문이 생겨난 것이다. 사진술은 19세기에 형성된 예술의 근간을 흔들어놓았다. 사진술이 예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것은 인상주의가 등장하면서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제작에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초상기술이 부르주아의 전유물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사진술은 순간적으로 대상을 재현해낼 수 있었기 때문에 혁신적인 기술이었다. 기술은 예술이라 여겨지는 것을 위협하게 시작했다.
발터 벤야민은 진품이 가진 아우라가 복제 기술에 의해 파괴되고 있다며 개탄했다.
예술이 가진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 19세기의 미학적 기준을 더욱 공고히하여 기술로부터의 위협을 받지 않는 것. 두 번째, 현대의 기술과 충돌하는 19세기의 미학적 이상을 거부하고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20세기 초 순수 예술에 대한 전통적 생각을 파괴하고 예술의 제도적 틀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련의 예술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아방가르드로 지칭되는 집단에는 미래파, 표현주의자, 다다이스트, 초현실주의자, 데 스테일 등이 포함되었다. 그들은 반복을 강요하는 기존 순수 예술은 따분하다고 생각했다. 아방가르드 운동은 예술의 모든 장르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새로운 예술은 당연히 논란을 수반했다. 아방가르드 운동은 전통에 대한 공격이었고 이를 이유로 군사 용어인 아방가르드를 차용하기 시작했다.
다다라는 기호는 모호한 뜻을 지녔지만, 다다의 메세지는 매우 분명했다.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다양한 아방가르드 집단은 애국심을 내세워 국가 간 전쟁을 부추기는 민족주의적 경향에 반대하는 국제주의를 지향했다. '다다' 또한 국제주의 지향을 물려받았다. 뉴욕은 유럽 대륙과 달리 1차 세계대전과 거리를 두는 도시였기에 보헤미안 국제주의자들이 이주하기에 적당한 도시였다. 1914년 구대륙의 수많은 예술가들(만 레이, 마르셀 뒤샹 등)이 뉴욕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뒤샹은 뉴욕에서 자신의 반예술적 예술관을 펼쳤다. 뒤샹과 같은 아방가르드 작가들 뿐만 아니라 이들을 이해하고 후원한 앨프레드 스티글리츠와 같은 갤러리 운영자도 있었다.
뒤샹은 '예술 작품' 개념에 도전하고자 했다. 뒤샹의 목표는 '반예술 작품'을 지향하는 예술이었다. 뒤샹의 도발은 예술사의 중요한 사건이지만, 뒤샹은 뉴욕에 만족하지 못했고 1919년 아방가르드의 최종 집결지이자 순수 예술의 뿌리가 깊은 파리로 떠난다.
파리에도 이미 새로운 예술을 위한 전투 의식으로 똘똘 뭉친 이들이 있었다. 취리히의 아방가르드 집단이 스스로를 '다다'라고 불렀다면, 파리의 아방가르드 집단은 '초현실주의'라고 불렀다. 둘의 한 가지 차이점은, '다다'는 반예술에 치중한 반면 초현실주의는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모색했다는 점이다. 초현실주의는 무의식을 발견한 프로이트를 통해 유럽의 오래된 전통인 이성주의에 반기를 들었고, 마르크스주의를 통해 새로운 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이상을 수용했다.
초현실주의의 트레이드마크는 자동기술법 Automatism 이다. 자동기술법에는 이성에 의해 통제되지 않은 무의식의 속삭임을 드러내 보이려는 욕망이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1926년에는 초현실주의 화랑이 개관하면서 초현실주의 그룹의 구심점이 형성된다. 만 레이, 마그리트, 달리가 이 화랑을 근거지로 활동한 중요 인물이었다.
1929년 뉴욕발 세계 대공황의 영향으로 파시즘이 화두가 된다. 1930년 독일에서는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당이 다수당이 되었다. 히틀러는 예술적 실험을 금지시켰다. 1933년 바우하우스는 폐쇄되었고, 에른스트, 피카소, 칸딘스키의 그림이 미술관에 압수된다. 그럴수록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파리로 결집하게 되었다. 나치가 유럽 침략을 시작하면서 1940년에 파리를 점령하자 아방가르드는 다시 여러 도시로 흩어지게 된다.
아방가르드에게 전통은 계승의 대상이 아니라 파괴하기 위해 존재하는 대상이었다. 그들은 "회화 예술의 기원에 속한다든가 회화에서 기본적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구성 요소들을 하나하나 의심"했다.
첫 번째, 아방가르드는 예술이 / 예술의 오브제가 일상에서 벗어날수록 예술의 완성도가 높아진다고 생각했던 근대적 미학관에 도전했다. 뒤샹은 <샘>을 통해 예술가의 과제는 재료 가공이 아니라 재료의 선택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두 번째, 아방가르드는 예술 작품이 전적으로 예술가의 통제와 서명 등을 통한 권위 아래 놓인 수동적인 존재라는 위치에 도전했다. 뒤샹은 자신의 새로운 시도를 '레디메이드'라는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기성복'이라는 뒤샹의 단어 선택은 다가올 소비 사회에 대한 예민한 예언이기도 했다. 예술이라고 소비 사회의 '예외'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 번째, 아방가르드는 예술이 장식이 되기 보다는 수용자에게 충격을 주더라도 삶의 진실을 드러내기를 원했다. 아방가르드는 미술관에 고립된 작품들에게 밖으로 걸어나오라고 명령했고, 일상에서 예술의 소재를 탐구했다. 그들은 베를린의 다다주의자들이 행했던 포토몽타주 실험과 같이, 일상의 오브제를 이질적으로 배치해 충격을 주는 데페즈망 기법을 사용했다.
미술관은 왜 반예술의 성격이 강했던 아방가르드의 작품들을 주목하게 되었을까?
예술 시장의 파이를 키워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인상파의 효과가 약해지자 예술 시장은 다른 곳에서 돌파구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시장은 공급과 수요의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 인상파를 대신해 아방가르드의 작품들이 가장 비싸게 팔리는 현대 예술 작품으로 자리를 잡았다. 아방가르드 작품의 이러한 고가 행진은 미술관들 사이의 경쟁, 그리고 미술품을 주식처럼 투자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자금의 형성이 빚어낸 결과이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을 과연 ‘성공’이라 말할 수 있을까?
* 예술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수요는 경제적 여유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기억! 예술 산업은 승자 독식 시장이다.
성공은 그들의 목적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반예술이라는 의도가 실현되는 과정에서 성공은 부산물처럼 그들을 따라왔다. 이후 부산물이었던 성공은 그들의 목적을 위협하는 역설의 기원이 되었다.
아방가르드는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근대적 신화를 공격한 집단의 이름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하지만 아방가르드는 성공의 역설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개인으로 미술사에 등재되고 개인의 이름으로 회고전을 갖게 되었다. 지독한 역설인 셈이다. 그렇기에 아방가르드의 활동은 ‘작품’ 범주로 포괄될 수 없다. 하지만 미술사에 아방가르드 구성원들이 ‘거장’이라는 이름으로 등재되고, 그들의 회고전이 미술관에서 열리는 동안 아방가르드의 과거 활동의 결과들은 뒤늦은 ‘작품화’의 메커니즘에 빠져들게 되었다. ‘작품’이라는 19세기적 범주에 포획된, 즉 작품화된 아방가르드의 활동 결과물 속에서는 아방가르드의 도발 정신을 찾기가 어렵다. 이러한 아방가르드의 역설은 아방가르드가 부정했던 제도-미술의 근원지인 미술관이 궁극적 승리자임을 보여준다. 그랬기에 아방가르드의 주요 활동들은 오히려 미술관 밖에서 펼쳐질 때 의미가 있었고, 미술관이 아방가르드를 그 안으로 수용하지 않을 때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방가르드 운동이 가장 찬란했던 시기는 사회가 아방가르드의 정신을 수용하지 못하고 아방가르드의 도발에 주춤거릴 때였다.
--> DDP에서 달리전을 관람한 것은 아방가르드의 역설에 일조한 것....ㅋ
아방가르드는 과거의 적인 19세기의 관습을 공격하는 데 집중하느라 20세기의 새로운 적에 대해서는 둔했다. 20세기의 새로운 적은 상업주의와 새로움을 독점한 ‘대중문화’였다. 대중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은 아방가르드 운동이 제시한 도발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대중문화가 제공하는 부드럽고 세련된 새로움 속의 아름다움이다. 소비주의가 승리한 사회에서는 또한 소비주의가 제공하는 아름다움이 지배한다.
미래에 우리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아방가르드 미술 전시회를 관람하고 ‘이해 불가능한’ 조각품을 구입하고 또는 해프닝에 참가한 사람들이 유행하는 패션이 지시하는 바에 따라 옷을 입고 치장을 한다. 그들은 패션 잡지, 영화, 텔레비전이 제시하는, 다시 말해 매스미디어가 제시하는 미의 모델에 따라 청바지와 유명 메이커의 옷을 입고, 화장하고, 머리 모양을 바꾼다. 그들은 상업적인 소비 세계, 즉 아방가르드가 50년 넘게 싸워온 바로 그 세계가 제시하는 미의 이상을 따르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순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설명할 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 이것은 20세기의 전형적인 모순이다. - 움베르트 에코, <미의 역사>, 418쪽
아방가르드의 적은 시장 경제이다. 게다가 시장 경제는 아방가르드가 제시하는 새로움보다 더 빠르게 새로운 것을 제시한다. 자본과 아방가르드의 공모는 단순 공산품을 명품이라고 부르며 자신들의 상품을 작품이라고 재포장하는 브랜드 산업의 판매 전략에서 절정에 달한다. 패션 산업은 아방가르드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스스로를 현대의 아방가르드라 칭한다. 하지만 이들의 본질을 떠올려보면, 이것들은 작품이기 보다 상품에 가깝다.
누구나 아방가르드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세상에서 아방가르드의 핵심을 다시 짚어보자. 첫 번째, 아방가르드는 새로움과 저항의 결합이다. 대중문화는 새로움을 신상품이라고 들이밀지만 '저항'이 없다. 예시로 2005년 뱅크시의 미술관 습격이 있었다. 뱅크시는 박물관에 몰래 형편없는 그림을 걸어놓았지만 관객들은 그것을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뉴욕 현대 미술관에는 앤디 워홀의 작품을 패러디한 것을 걸었다. 워홀의 그림이 현재 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미술관이라는 제도가 워홀의 작품을 예술이라고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뱅크시의 워홀 패러디 그림은 미술관의 승인 제도 없이 침투한 것이기에 작품이 아니다. 뱅크시는 미술 제도에 저항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익명으로, 그리고 길거리에 그림을 남겨 거장화-작품화할 수 없도록 한다. 시장이 아방가르드 정신을 상업적으로 다시 포섭하는 전략의 위험성을 고려한 것이다.
- 척후병 : 정찰을 맡은 병사
- 섬멸 : 남김없이 모조리 무찔러 멸망시키는 것
- 숭상 : 높여 소중히 여기는 것
- 안티테제 (영어로 antithesis) : 과거의 주장인 정립에 대립되는 주장 또는 2개의 상반되는 것이 대립을 위해 함께 도입될 경우 사용되는 단어
- 흡인력